신데렐라 맨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반의 비디오 대여점의 행태는 상당히 변태적이었다. 워너나 폭스 같은 직배사가 들어오기 전인 80년대의 비디오 가게에선 국내 개봉작들과는 거리가 먼 시리즈 중국무협물과 B급 액션, 호러물들이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현재 개봉작들이나 미개봉작들을 찾으면 주인이 파일로 된 목록을 보여준 뒤 선택물들을 창고 같은데서 꺼내서 오거나 제2의 진열장이 있는 은밀한 장소로 인도되기도 했다.

당시의 그런 비디오테잎들은 공테이프에 외국의 것을 그대로 복사한, 자막이 없거나 어설프고 조악한 자막이 있는 것들이었고 국내 극장에서 캠코더를 이용해서 그대로 찍은 테잎-<터미네이터>가 그랬다, 이 유통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는 검열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나름대로 원판’의 영화들이 홍수처럼 쏟아졌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디오방’이라는 기형적인 형태의 휴게 극장이 탄생해서 오갈 데 없는 백수들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했다.


엊그제 <신데렐라 맨>을 봤는데 불현듯 그 당시에 삐짜 비디오로 봤던 <록키4>와 기억이 맞물리면서 당시의 감동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람보2>로 슈퍼스타가 된 실버스타 스탤론과 지금은 어엿한 B-무비 스타로 자리 잡은 신예 돌프 룬드그랜이 출연한 <록키4>는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었고, 무시무시한 고가의 수입료로 극장 개봉이 늦어지고 있을 때 제조인불명의 불량비디오는 문화불모지 소년소녀들을 세계화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었다.

지금에서 보면 요즘 초딩들도 치를 떨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만큼 요즘 애색희들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성장했다고는 절대로 생각 않는다- 통나무 하나 어깨에 메고 독기하나로 연습하던 헝그리 미국 복서가 소련의 첨단과학으로 중무장한, 마치 기계인간이나 다름없는 거함 복서를 물리친다는 스토리 라인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복싱 영화 특유의 비쥬얼은 상영시간 내내 좌심방우심실을 쪼그려 놓을 만큼이나 역동적인 것이었다.


<신데렐라 맨>은 <록키 4>만큼이나 역동적이다.
지루할 수도 있는 권투시합장면의 숨 가쁜 전개가 좋다.
중반이후 주인공의 죽음으로 초점을 몰아가는 심리와 상황 전개 또한 집중력 있고,
실업과 위기로 상징되는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 부상과 악운에 의한 개인의 몰락, 그리고 시대의 고난을 극복하며 신데렐라로 성장하는 과정이 꽤나 탄탄하다.
시대와 개인을 표현하는 요소들은 마지막 사각의 링에서 결집되면서 흔하디흔한 ‘감동 드라마’라는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민망하지 않게 이끌어 낸다.
적잖이 만화적이기도 한 연출도 재미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록키4>가 떠올려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전쟁에 대한 공포를 내재하고 있었던 중학생 소년의 마음과
가족에 대한 사명감, 사회적 생존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사는 유부남 아저씨의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을 대하는 두려운 감정의 동질성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불법, 어설픔, 은밀함 등으로 기억되는 당시 삐짜 비디오들의 이미지와,
낡음, 음습함, 추억 등을 떠올리는 원주 ‘문화극장’의 이미지가 묘하게 매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에게 <신데렐라맨>은 그렇게 <록키4>와 연결되어 버렸다.
by 지루박 | 2005/09/23 09:47 | 울지마 영화 | 트랙백(1)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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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at 2005/09/25 02:48

제목 : 신데렐라 맨 - 오히려 신선한 정공법
아내 매(르네 젤위거 분)와 귀여운 세 아이를 둔 복서 짐 브래독(러셀 크로우 분)은 패전과 대공황이 겹치며 비참한 가난에 접어듭니다. 부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짐에게 매니저 조(폴 지아매티 분)가 찾아와 시합을 권유합니다. 짐은 돈도 벌 겸 은퇴경기라 생각하고 승낙합니다. 우직하지만 가족을 아끼는 선 굵은 복서, 조용히 내조하는 아내, 귀여운 아이들, 가볍지만 의리를 지키는 매니저, 사악한 프로모터, 압도적......more

Commented by marlowe at 2005/09/23 09:59
저도 [신데렐라 맨]의 제목을 듣고 cross dressing을 다룬 이야긴 줄 알았습니다.
Commented by 푸무클 at 2005/09/23 11:01
어릴때 제 남동생들이 어찌나 실버스타 스탤론 영화랑 돌프 룬드그랜 영화를 좋아하던지.
맨날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그 사람들 나오는 액션영화만 줄창 빌려왔었어요.

주인공 네버다이 일당백의 그런 스토리..지겨워 죽을 뻔;;..
Commented by 꿈의대화 at 2005/09/23 11:20
찬호형이 신데렐라맨보고 감동먹었데요. '나도 재기해야지'하면서.

르네씨 이야기가 없군요.
Commented by 지연 at 2005/09/23 11:25
중학교때였나? 시험끝나고 친구들과 동네 비디오집에 가서 잘생긴 남자주인공나오는 재밌는 영화한편 달라고 했더니...미성년이 봐서는 안될 비디오를 줬더라구요. 친구들과 -어머머 어머머-하면서 빨리재생하기 눌러가며 다 본후, 다시 갔다주면서 "아저씨, 이 남자주인공 못생겼어요. 다른거 주세요"하며 5분정도 본척하고 돌려줬던 기억이 나네요^^;;
Commented by hoongoon at 2005/09/23 11:51
80년대초였던가요?
처음으로 저희집에 소니의 베타비디오를 들여왔었는데...
그때 큰 가죽가방에 비디오테입을 대여 및 판매해주시는 분들이
가끔 오시곤 했지요. 주로 홍콩액션물의 카피판.
그렇게 많이 보곤 했었는데...^-^
Commented by catterfly at 2005/09/23 13:39
혹시 빨간 머리끈을 한 한 소녀가 임신을 한 채 일들이 일어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세요? ㅠ.ㅠ
Commented by Eternity at 2005/09/23 21:06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어요~~~

보러 갈 사람 구해요 ㅠㅠ
Commented by subsidy at 2005/09/23 23:42
Eternity님 저를 구하세요.
Commented by 쿨라 at 2005/09/24 08:47
맙소사...저...저...수염을 깎아버렸으면;;
오랜만에 왔습니다^^;
Commented by fish at 2005/09/24 14:48
얼굴만 빼면 디즈니에 나오는 신데렐라랑 아주 흡사합니다요. 80점은 드리겠습니다. 후훗.
Commented by 접촉불량 at 2005/09/24 20:52
옛날 얘기는 왠지 소외 [먼산] 너는 내 운명,인가 18세금이라 포기했는데
신데렐라맨 보러 가야겠네요. '신데렐라'인데 무려 '복싱'이라니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5/09/26 13:35
marlowe님/ 역시 동감하셨네요. 성장해서 용되는 케이스를 나타내는 말이 과연 신데렐라밖에 없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어휘력이 짧은지라...
푸무클님/ 그나마 스탤론은 드라마적인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돌프 횽아는 좌절이지요.
꿈의대화님/ 르네 언니는 제 스타일이 아니란 걸 다시 깨달았습니다. 르네언니는 그냥 계속 일기나 쓰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지연님/ 여중시절의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그 영화의 제목이 궁금해지네요. 미남 주인공 마흥식이나 한지일 아저씨 나오는 거면 안되는데...
hoongoon님/ 저희집도 한대 베타 비디오를 봐야했던 때가 있었는데(저희 껀 대우) 베타는 테잎 구하기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큰 가방...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catterfly님/ 흡...죄송해요. 말씀 하신 거론 잘 모르겠어요. 빨간 마후라는 알겠는데....히힛, 죄송.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5/09/26 13:35
Eternity님/ 추천 할만은 한데, 혼자라도 보심이... 요즘 솔로부대원의 독기가 한 것 느껴지던데요...
subsidy님/ Eternity님께 연락하셨나요?
쿨라님/ 귀여운 수염~
fish님/ fish님만큼 재주가 없어서리...(칫, 미워!)
접촉불량님/ 웃통 벗고 권투하는 신데렐라횽아 이야기예요. 러셀 크로의 탱글탱글한 가슴은 볼만...
Commented by 또레몽 at 2005/10/04 20:53
아아.. 보고싶네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5/10/05 16:54
또래몽님/ 재미있게 보셨어요?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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