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본 영화
EBS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대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탄성이 나온다. 오래된 한국영화라든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을 브라운관을 통해(아..‘브라운관’이란 표현이 이렇게 낡아보이다니..)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 고전명작들을 일일이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기회를 꾸준히 주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흐뭇하다.
'소피의 선택'(EBS TV HD)은 스필버그의 ‘쉰들러리스트’와 많이 닮았다. 1차대전 후 유태인 차별에 앞장섰던 아버지의 딸이었지만 애인과 레지스탕스와의 관계 때문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비운(!)의 여인네 메릴 스트립. 딸과 아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선택의 장면은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지난 3월초엔 재탕의 명가 KBS(그넘의 머니시스트, 21그램 방영은 제발 그만..)에서 방송 80년을 맞아 한국영화 대표작들을 몇 개 엄선해서 HD로 방영했다. 말로만 HD인 극악의 화질은 여러 사정을 감안해서 넘어간다. 여하튼 그 기회를 통해 ‘별들의 고향’과 ‘애마부인’(이상 KBS TV HD)을 봤는데 두 영화 모두 당시 시대 분위기가 느껴져서 재밌었다. 그리고 가족관계나 남녀간 계급 관계의 불평등한 부분이 역시 눈에 띈다. 여튼 그러려니 하며 보고 있을래도 남성들이 여성들에 날리는 손찌검은 상당히 거슬린다. 쌍팔년도 체육선생도 아니고 입만 열면 뺨 때리고 맞받아치고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심히 눈과 맘이 불편타.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라 할 만한 ‘쉬리’(KBS TV HD)를 처음 보았다. 역시 당시에 ‘한국 영화 같지 않아’, ‘전혀 어색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총격전 장면이 상당히 리얼했다. 허나 당시의 배우들은 연기력이나 외모에서 그때보다 훨씬 성장한 까닭으로 10년 전 당시 모습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송강호의 어설픈 서울말과 진지함이 왜 그렇게 우스운지. 게다가 대사 하나하나가 김성모 만화의 대사처럼 얼마나 어색한지. 열대어 어항에서 천연루비 7개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천하장사 마돈나'(DVD 대여)도 이제야 보았다. 한국 코메디 영화의 새 지평이니 소재개척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던지라 상당히 기대를 했다. 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찌 일본 코메디 영화의 느낌이 많이 났다. 일상적인 작은 소재와 과장된 연결 상황. 아무튼 이런 식으로라도 한국 코메디 영화가 조금씩 진보해 갔으면.
임권택 박스셋을 사서 5개 작품 중 세 작품을 봤다. ‘아제아제바라아제’와 ‘서편제’, 그리고 ‘태백산맥’(이상 DVD). 최근에야 대형작들을 내고 있는 임권택 감독이지만 천하의 임권택도 예전 7,80년대에는 B급 액션물을 찍던 다작 감독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분의 최근 영화를 보면 ‘역시 영화는 연륜빨이다’라는 믿음이 확고해진다. 원작의 이야기를 다 담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리고 이념의 물리적 균형에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태백산맥’은 조.금. 실망이었지만(하지만 인물들의 캐릭터와 이념적인 문제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들의 표현 등은 좋았다) ‘아제아제..’와 ‘서편제’에서 감독이 인간에 대한 성찰에 몰입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돌아와 누님 앞에 선 인생에 대한 관조 모드. 이쯤 되니 그때부터 거장의 길로 고고씽~.

'라디오 스타'(SBS TV HD)는 상영 당시 줄거리 한번 듣고는 ‘흥미없는 영화’로 낙인찍어 버렸는데, 확인해보니 역시다. 개인적으로 오래된 추억을 더듬고 애무하는 영화를 꽤 좋아하지만 그 부분이 매니악 함 없이 어설프게 과장하고 신파조로 가는 건 별로다.

화질에 대한 공포감에도 불구하고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서 보는 건 조악한 표지 디자인에서 풍기는 아우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쌓아놓은 비디오테이프를 조금 정리하면서 보고 싶은 테이프를 몇 개 추려 보았는데 대부분이 작가불명, 배우불명에다 유치찬란한 문구가 있는 B급 영화들. 유명한 대작들을 찾아보는 것 보다 무심코 보게 된 무명의 영화가 예상외의 흥분을 주는 그 느낌이 좋다. '비운의 모차르트'(VHS)는 그런 느낌이었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연재중이라는 그 유명한 '고르고 13'(DVD)을 봤다. 느낌이 상당히 묘한 애니메이션인데 침침한 분위기와 무게가 이야기 내내 압도. 주인공 이 양반 정말 대단하다. 잊을 만하면 여인네들과 붕가붕가. 그것도 끝내주는 붕가붕가. ‘300’(THEATER)이 테스토스테론이 넘쳐나는 육체미와 즘승같은 야성미의 화산폭발이라면 고르고 13은 정액의 화산폭발과 남자가오의 화산폭발이라 할만 하다.

코엔형제의 '레이디 킬러'(MBC TV HD) 역시 이 형제의 이야기답게 아기자기하고 재밌었고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DVD)는 역시 팀버튼 제작의 영화라는 느낌을 주었다. 명감독의 영화들은 실망시켜주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 준 두 작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프레스티지’(DVD 대여)는 전작 ‘메멘토’에서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보는 것, 느끼는 것에 대한 왜곡, 오류’를 이야기 하는 듯. 적절한 장치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재능이 놀랍기만 하다.

        
시티 오브 갓’(DVD)은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영화였다. 브라질 어느 슬램가 폭력의 아수라장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현실. 액션 영화로서의 가공된 긴장감, 흥분에다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아픔이 혼재된 생동감 넘치는 참상.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DVD) 역시 월남전이후의 부적응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사회 정의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세상의 참상을 고발했다. 역시 세상은 무섭다.
by 지루박 | 2007/04/07 23:21 | 울지마 영화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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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starot at 2007/04/07 23:46
어차피 전 이준익 감독 영화보고 꽂힌 적이 없는지라(이 감독 영화는 2% 부족한 거 같아요.) '라디오 스타'에도 별 관심을 안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 재밌다는 황산벌도 참 실망스러웠었죠-_-;;(하다못해 신라 쪽 사투리 연기라도 좀 제대로 해 줬으면..)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4/08 00:05
고르고13은 비아그라 마스코트로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GamerDash at 2007/04/08 00:19
TV의 해악을 이야기하지만, 골라서 필요한거만 잘 찾아보면 공중파만한 공짜밥도 없죠.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08 18:03
Astarot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디디어는 상당히 좋은 사람인데 항상 2%의 헛점과 아쉬움이 남는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

marlowe님/ 마루에서 혼자 보고 있는데 와입후님이 왔다갔다하다가 화면을 보면서 야한 영화본다고 야단 치더군요.

GamerDash님/ 더빙이 싫어서 티비로 영화를 안봤었는데 비싼 티비 사고나선 티비가 훨씬 더 좋다는걸 알았습니다. 가끔씩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 보는것도 좋구요. 미국드라마 좋아하면 그것도 좋겠더군요.
Commented by 1mokiss at 2007/04/09 22:42
롯데! 단독1위 질주!! 라는 옆에 있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올해 롯데는 과연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을런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야구의 계절이 시작되었어요! 저는 삼성으로 배신해야할지 살짝 고민중-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09 22:54
주말엔 3연전 모두 중계가 없어서 네이버 문자중계에 경남방송 라디오 중계를 아프리카로 틀어놓고 모니터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공부를 이 정도 정성으로 했으면 고시 3관왕은 했을텐데...
1mokiss님 말씀대로 롯데는 항상 초반에 반짝하다 마는 팀이라 큰 기대는 안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기적은 바라고 있지요..흐흐.
Commented by punctual at 2007/04/13 09:41
EBS는 입시관련한 방송이 후지다는 것 빼고는 (그게 본연의 자세인가요? ㅋㅋ)

요즘 더 좋을 수 없을정도로 좋은 방송을 보여주고 있지요.

kbs가 좀 이렇게 바뀌었으면 할 정도로..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13 18:29
KBS는 가끔씩 다큐멘터리가 볼만하다 싶은게 있는데 그것 말곤 케이블 방송이나 SBS같은 상업방송과 전혀 다를바 없는 막장 프로들로 만땅이라 시청료 아까워 미치겠습니다.
태양의 서커스나 자미로콰이 공연 같은 것도 모두 EBS로 봤군요. 완소!
Commented by 남모 at 2007/04/15 08:18
영화에 대한 감식안이 뛰어난 이들을 보면 부럽기만 합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생각의 폭이 다르다는 것, 쉽지 않은 재능이지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15 18:54
과찬의 말씀입니다. 글 재주가 없어서 쓸때도 힘들거니와 썼던 글 읽어볼때도 어색한 표현이 눈에 듸어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이잉...
Commented by 닥쓰 at 2007/04/22 01:01
롯~데 롯데롯데롯~데
롯~데 롯데롯데롯~데
롯~데 롯데롯데롯~데
승리의 롯데~

오늘 현대랑 초 재밌었습니다.

1회에 목쉬긴 처음.. 롯데만세!!!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22 22:15
오늘 5시간의 대혈투는 상당히 아쉽네요.
아깝게 졌어요. 아흑..
Commented by sesism at 2007/04/23 17:00
저는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초난강이 나올때마다 초뒤집어졌습니다. 아아 난강씨 너무 웃겨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7/04/24 00:35
저도 초난강 나올때마다 즐거워서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자신의 히트곡(!) 가사를 이용한 대사라든지 그 어눌한 대사...아아, 그야말로 완전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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