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 11, 12월에 본 영화
최근 석 달 간 통틀어 본 영화 정리.

첩혈쌍웅(DVD)
1986년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그때 육상에서 임춘애선수가 라면만 먹고 뜀박질을 해서 금메달을 3개나 땄다. 철제 도시락의 찬밥에, 계란 발린 빨간 해바라기 쏘세지로 연명하던 모범 소년의 입장에선 매끼 먹는다는 따끈한 국물의 라면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론의 구라로 포장된, 조금은 가공된 스타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하튼 가난함을 단번에 느낄 빈곤 비쥬얼 뼈다귀 소녀의 라면스토리는 사타구니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 국민에게 캐감동을 주었다. 대회 마지막 날 복싱 전체급 석권이라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편파판정의 큰획을 그리면서 아시안게임은 끝났다. 없이 살아도 비겁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1986년 이었다.
헝가리국민도 아닌데 헝그리정신은 그 시절의 국훈이었다.

1987년 중학교 3학년 때 나를 굉장히 괴롭히던 선생이 하나 있었다. 악몽같은 1년이었고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이라는 직업의 레벨을 개보다 아래에 두는 계기가 되었던 한해였다. 가까운 친척들도, 지금의 내 와입후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여하튼 그때 선생이라는 것들에 받은 상처는 인생 내내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의 무자비한 폭력을 경험해서 가끔씩 티비에서 은사를 찾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 난 왜 인생에서 한번도 스승을 만난 적이 없을까 생각을 한다. 그 해 가을, 과목별로 갈기갈기 찢은 ‘15년간 고입 총정리’ 문제집을 옆구리에 끼고 서면 동보극장에서 ‘영웅본색’이라는 영화를 봤다. 일본방송에서 가끔씩 하던 듣보잡 형사물류의 영화인줄 알았는데 보고나서 무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당신의 가르침이 절 희망의 중소기업 과장으로 만들었어요....는 훼이크고....

1988년 고1 때. 그 해 대학을 졸업한 담임이 교실 뒤 게시판에 파격적으로 왕조현과 장국영 사진을 붙이는 걸 허락해 주었다. 아이들은 ‘선생 참 개념있네’라고 느꼈으나 몇 달 되지 않아 28살 충청도 출신의 순박했던 담임은 혈기왕성한 폭력 선생이 되어버렸다. 극장가에서는 몇 년간 변강쇠, 가루지기, 고금소총 같은 수퍼에로히어로물이 연달아 개봉되면서 극장은 개봉관만이 아니라 재개봉관도 진국이란 걸 알았고 이 즈음부터 쏟아진 이블데드, 바탈리언 같은 호러물들은 우울한 사춘기 소년에 홍콩행 항공권을 제공했다. 전대갈 킹왕짱! 게다가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의 히트 이후 홍콩액션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대도유가리, 나부락 같은 듣보잡 주연인 B급액션물도 극장에 걸릴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영화를 보던 시기이지만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의 서울에선 천막살이하던 상계동 철거민들을 철거깡패들이 강제로 몰아내던 일도 있었다. 왜냐하믄 성화봉송 때 다른 나라사람들이 보면 쪽팔리니깐. 몇 년 지나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깝깝해 했던, 바로 그 내용의 한해였다.
임금님, 그때 왜그러셨어요

첩혈쌍웅이나 그 당시 느와르물을 보면 언제나 ‘옛날’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살았는지, 세상은 얼마나 더 불쌍하게 돌아갔는지. 화약연기 속에 피어나는 땀내 폴폴 나는 수컷들의 우정과 총싸움질 같은 걸 보고 있으면 뜬금없이 ‘씨발, 나 잘 되야 되는데... 우리나라 잘되야 되는데....’하고 저급하고 괴상한 바램이 생긴다. 급기야 성당 안을 날아가는 비둘기 떼를 보고 있으면 ‘피스!’를 외치고 싶어 입이 근질하다.

첩혈쌍웅이 한국 배우를 주연으로 한국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된다는 뉴스를 본 듯하다.

하지마라. 민폐다.

베오울프(THEATER)
공연이나 영화를 못 본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게 몇 건 있는데 ‘폴라 익스프레스’를 3D로 보지 못한 것이 그 중 하나다. 또다시 후회를 하지 않으리라 하고 아이맥스3D 관람을 위해 퇴근하자마자 지하철타고 용산으로 가던 중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 그냥 중간에서 내려 디지털 3D로 봤다. 2시간 가까이 입체 안경을 쓰고 보는 건 상당한 피곤한 일이긴 했지만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놀랐던 신기함과 영화 보는 내내 가졌던 흥분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역시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건 또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표를 사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 멍청하게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요즘 애들은 옷을 ‘섣불리’ 입지 않는 것 같다. 예전엔 특별한 장소가 아니면 멋을 잔뜩 부리고 치장을 한 사람이 반이면 그 나머진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던가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느낌의 사람들이 반이었다. 분명히.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런 것 같다. 모두가 패션모델이다. 근데 나는 점점 이런 쪽에 둔감해 지고있다. 지금이 여름이라면 반바지, 흰운동화에 까만 양말 바짝 올려 신고 홍대앞 클럽에서 토끼춤을 출수 있을 정도로 용기 충천해 있다. 나를 가꾸고 즐기는 일에 돈을 쓰는 순위가 점점 밀린다. 아저씨가 되고 있는겨. 그래도 술값, 디비디값, 음반값은 꾸준히 나가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보고나서 안경은 반납하는 줄 알았는데 들고 올수 있었다. 가끔씩 집에서 거울 보면서 끼고 논다. 코밑에 김을 붙이고 놀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시도 해봐야지.

아이로봇(TV HD)
집에서 티비로 보면서 ‘이거 극장에서도 보고 책도 읽었는데 결말이 어찌되는지 기억이 잘 안나네. 하하’하고 집에서 같이 보던 사촌 동생에게 말했다. 엊그제 본 영화를 이렇게 몇마디라도 적으려고 하는데 또 기억이 안 난다. 난 진정 돌대가리인가.

1월1일부로 와입후님의 다짐을 받고 다시 담배를 끊었다.

아빠가 필요해(TV HD)
1월 1일에 채널 돌리다 EBS에서 하는 걸 잠시 봤는데 재미있었다.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인데 DVD 출시는 되지 않은 듯 하다. 이거 어떻게 하면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가 내 블로그를 보고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워요'하면서 고마움의 표시로 손수 제작한 디비디와 함께 현금 백만원을 보내줬으면 좋겠다.

by 지루박 | 2008/01/06 23:03 | 울지마 영화 | 트랙백(1) | 덧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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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ong term vi.. at 2008/06/2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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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에바초호기 at 2008/01/06 23:22
"아빠가 필요해"가 대단한 작품이긴 한데...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현금을 보내준다면 애니 제작을 못할듯 합니다...;;;
그만큼 요새 애니 제작은 가시밭길이라는....ㅡ,.ㅡ;;;
(분명 농담이었는데 뭔지 모를 이 슬픔은 대체 무엇인가...)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1/06 23:28
가끔 저 주윤발의 포즈로 누군가를 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확실히 요즘 젊은 사람들 옷 맵시가 대단하죠.
(젊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멋이지만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8/01/06 23:32
"아빠가 필요해" 저도 오방 좋아해요..
이런 덧글 남기면 고마움의 표시로 디비디와 함께 현금 십만원이라도 받으려나;;
+ 지루박님! 포스팅 좀 가열차게 해주세요~너무 뜸하세요.
(이러면 지루박님이 고맙다고 돈만원이라도 던져주시려나;;)
Commented by 레인블루 at 2008/01/07 01:28
아이구. 오밤중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Layner at 2008/01/07 02:13
베오울프는 아이맥스3D로 봤는데 파라마운트 로고 나올 때 제일 감동했습니다. :)
담배를 끊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
Commented by 조나쓰 at 2008/01/07 12:42
베오울프, 저는 3D인지도 몰랐고, 극장에서도 아무 것도 쥐어주지 않아서리, 영화 보는 내내, 어째 화면이 좀 특이하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다는..
아이로봇은 '로봇3원칙'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되는 트릭은 전혀 기억 안나심.. 책으로도 두 번을 읽었는데.. 이 정도면 제 건망증이 심각한 건가효?
Commented by 휴지 at 2008/01/07 15:58
마지막 문장의 헝그리정신!!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08 00:09
에바초호기님/ 현금이 안되면 감독님이 소장한 도자기류나 풍경화라도..;;
애니메이션계의 어려움은 예전에 논문 쓸 때 소재가 그 쪽이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요.. 꽤 많은 애니회사들 찾아가고 애니메이터들 만났었는데... 흙흙, 압니다...

marlowe님/ 어릴 때 저 포즈로 사진 찍는 애들 많이 봤습니다. 간지 철철.
지하철을 타도, 시내를 나가도 멋쟁이들만 외출하러 나오는 듯합니다.

conpanna님/ 쏘주 만원어치 사드릴 생각은 있습니다.;;;

레인블루님/ 오늘은 나름 좀 진지하지 않았나요?^^

Layner님/ 요즘 말려서 죽겠습니다...

조나쓰님/ 안그래도 직원 하나가 베오울프 보고 와서 ‘최악으로 재미없다’고 악평을 했는데 입체 영상이 아니었으면 그럴만도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로봇3원칙만 기억나고 어떻게 해결됐는지 보고도 기억이 안나는지라... 저하고 같은 증세입니다. 조나쓰님도 술, 담배 끊으셔야 되요. 아하하.

휴지님/ 헝그리이기도 하지만 궁상 내지는 갈취라고도.

Commented by arkhe at 2008/01/09 00:00
그도 그렇지만 요즘 애들 옷 정말 춥게 입고 다니지 않나요?
젊어서 피가 끓는건지 '간지'내느라 그러는건지..보면 제가 다 추워요;
Commented by 1mokiss at 2008/01/09 01:51
요며칠 '첩혈쌍웅'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보게 되네요. 새해가 된 지도 꽤 지나가지만,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기분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바라겠습니다.
Commented by GamerDash at 2008/01/09 12:26
전 바리깡들고다니면서 머리 밀어주고 싶은생각이 우선이라 옷이고 간지고 그런건 뵈지도 않더군요.
Commented by 맥스 at 2008/01/10 01:44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금연 꼭 성공 하시기 바랍니다.(저는 줄일수는 있어도, 완전 끊기가 너무 힘드네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8/01/10 13:11
역시 말은 내뱉어야 맛이군요!
쏘주 만원어치만 먹고 곱게 물러나겠어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10 15:52
arkhe님/ 추워보이긴 하지만 고마움에 마음이 훈훈해져서 전 더 따뜻해져요.

1mokiss님/ 고맙습니다. 음력설때 새해 인사 한번 제대로 드려야겠습니다. 연초 너무 느슨하게 집에서 지내다 인사를 못했군요.

GamerDash님/ 머리는 남녀불문 장발들을 제가 좋아해서... 몇가닥 없는 머리 요즘 다시 기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에헤헤.

맥스님/ 끊었다 다시 피웠다 하면서 조절(!) 하는거죠...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conpanna님/ 만원어치 일단 제가 사면 2, 3차는 conpanna님이 계속 사시는거죠. 조만간 달립니까?
Commented by 정승룡 at 2008/01/12 15:36
저런 애니가 있었다니, 언뜻 보기만 해도 아트웍이 꽤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 눈 많이 오네요. 흡.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13 23:42
어제 내내 삽질 하셨겠네요....ㅠㅠ
빨리 나와요~
Commented by spacenote at 2008/01/14 19:27
이런 소중한 포스팅을 이제야 봤어요. 제가 좀 바빴나봐요~. 지루박님을 향한 자꾸만 커져가는 이 애정을 어찌 해야 할까요? 너무 재밌으세요. ㅠ_ㅜ 지루박님이 잘되야 이 나라가 잘되는 게 맞구요~ 저두 좀 꼽사리껴서 잘 되고픈 왕바람이 있네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15 00:31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애정을 끈으로 나중에 제가 회사 차리면 무급 비정규직으로 우주공책님을 고용하고픈 사악한 바램이... 롱담입니다.
Commented at 2008/01/16 14:2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uise at 2008/01/16 17:22
아시안게임,올림픽 시즌에 잠실에 살았던지라 원없이 외국인을 구경하고 특히나 햇볕좋은날 모두모두 훌렁벗고들있었던
강렬한 기억이..ㅎㅎ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20 23:05
비공개님/ 와,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우왕ㅋ굳ㅋ
추천만으로도 눈물...감사감사!

luise님/ 불끈불끈 뿔뚝뿔뚝... 80년대엔 확실히 외국인들이 귀했어요.
Commented at 2008/01/21 12: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yzma at 2008/01/25 13:17
비둘기만 보면 피스...허허허~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1/26 22:42
헤헤헤...티스토리로 옮기셨군요...히히..
Commented at 2008/02/18 11:1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2/20 14:11
비공개/뭐, 알아서...
Commented by 진군 at 2008/05/12 21:20
아빠가 필요해 단편애니를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애니관람후 감독이 나와 이야기를 하였는데...
우리들이 백만원을 드려야 할듯 싶었었습니다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5/13 23:19
진군님의 얘기를 들으니 더 보고싶어지네요.
열악한 환경에서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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