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김밥을 만들자
정말 오랜만에 올리는 저질음식 만들기 글. 그러고보니 예전엔 변태스럽긴 했으나 나름대로 직접 음식을 만들고 와입후님께 대령하고 그랬었습니다. 아, 기특도 하여라.

서울에서 다시 생활한지 이제 10개월 정도. 공기 좋은 곳에서 살다가 서울로 돌아온 몸은 20년을 냉동인간의 상태로 있다가 깨어났더니 20년전의 폐와 20년전의 피부로는 현대의 먼지와 공해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20년동안 불어나 있는 통장의 이자로 다른사람의 적응된 장기를 사서 생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젠 약해 빠진 '소녀의 몸'. 하계동 은행사거리의 의사선생님도 극한의 처방을 하다가 하다가 두 손 들어버린 무서운 감기도 여전히 진행중.

이번에 손댄 음식은 충무김밥입니다. 만들기 쉬워 보인다는 만만함도 있고 얼마전 통영 여행에서 한이 맺힌 것도 있고 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충무김밥은 기원전 374년 경, 요녕식 동검을 허리에 차고 고기잡이를 하던 남편을 위한 아낙네의 청동제 도시락 반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땐 요즘처럼 보온도시락이 없어서 김밥도시락에 든 시금치가 쉽게 쉬어버리는 바람에 남편은 밤마다 설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낙네가 충무 바닷가에 죽어 있는 대왕오징어를 주워다가 대강 고춧가루 비벼서 줬더니 남편이 맨밥에 김만 말은 김밥도 잘 쳐먹고 들어오던 데서 유래합니다. 네, 거의 거짓말.

먼저 깍두기 김치를 만드는 단계.
슈퍼에서 680원짜리 토막난 무우를 사서 삐뚤삐뚤하게 칼로 썰면 그럴싸한 모양이 나옵니다.

우유컵으로 2컵 정도의 물에 식초 반컵, 소금 조금 넣고 1시간 정도 무를 절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체에 무우를 건져서 2시간 정도 말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꼬들해 진다고 인터넷의 어떤 분이 올린 글을 봤습니다. 야구 중계가 시작될 때 절이고 끝나갈 즈음에 양념을 하면 됩니다.

무을 절이는 동안 5마리 2900원하는 오징어를 인수분해합니다. 오징어 창자는 미련을 갖지 말고 과감히 버리고 껍데기도 깔끔하게 벗깁니다. 껍데기가 잘 안벗겨지는 수줍음 많은 오징어가 종종 있는데 이럴땐 그냥 안벗기면 됩니다. 껍데기 먹는다고 죽지도 않을 뿐더러 그 시간에 책을 한 글자 더 보는게 훨씬 유익합니다.

벗긴 오징어는 뜨거운 물에 데칩니다. 보글보글...

데쳐진 오징어의 각을 뜬 다음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식초, 설탕, 참기름, 후추 등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었습니다. 각각의 양은 적당히. 한국요리의 양념은 언제나 적.당.히.

야구중계가 끝나고 나면 무를 양념합니다. 고춧가루 많이, 새우젓 조금, 다진 마늘 조금, 소금 조금. 그러면 이렇게 멋진 비쥬얼. 하지만, 맛은 통닭집 무의 맛입니다. 아무래도 식초 배합에 문제가 있었던 듯.

그리고 김밥말기. 충무김밥은 아무것도 안들어가니 밥만 잘 처발라서 손으로 말면 됩니다. 밥은 김을 길게 2등분해서 말았습니다. 밥이 물방개가 나오는 무등야구장 수준으로 질퍽해서 힘들었지만 괜찮습니다.

잘 말아진 김밥을 3등분씩 하면 이렇게 예쁜 모양. 총 5장으로 김밥을 만들었는데 김밥에 들어가는 밥량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입니다. 김밥지옥의 1000원짜리 김밥이 위대해 지는 순간입니다.

그간의 노동을 마무리하는 전체샷. 결과적으로 오징어는 대성공. 김치는 실패입니다.

역시 충무김밥엔 맥주!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 부들부들 왼손으로 셧터를 눌어서 5컷만에 성공한 아웃포커싱 예술샷하고 요지랄.


뭐 그렇게 잘먹고 잘 살았습니다. 끗.

by 지루박 | 2008/06/16 01:04 | 달려라 일기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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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빈틈씨 at 2008/06/16 01:09
막샷의 충무김밥 뒤로 보이는 저 보리차스러운 컵에 담긴 것은 기포가 없는 걸로 봐서는 정말 보리차 같기도 하고 맥주 같기도 하고
(아 술도 못 먹으면서 이런건 대체 왜 궁금해하는것인지)

그건 그렇구 이런 걸 정말 만들어서 부인님께 진상을 올리신단 말이십니까? =.= 아 정말 아름다운 남편이시군요.
당장 포스팅을 프린트해서 남편햏한테 보여주며 이 밤 몹시 괴롭히고 싶어집니다 ^^
Commented by 빈틈씨 at 2008/06/16 11:06
다른 분 블로그에서 혼자 자문자답을 하고 있군요 -_-;
어제 밤엔 노트북 액정 작은 데에서 보다, 맑은 정신으로 큰 LCD로 보니 이제서야 눈에 띄는 '맥주'.....
어딜가나 이렇게 참 틈이 많은 걸 자랑질 하고 다니는군요 -_- 아 -_-;;;;
Commented by 꿈의대화 at 2008/06/16 02:03
우왕ㅋ방가방가ㅋ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6/16 08:14
오랫만입니다. 서울로 오셨군요.
Commented by 우유차 at 2008/06/16 08:55
여섯 시간짜리 야구 경기를 보면서 만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
빈틈 님/ 아주 얇은 기포층이 벽을 타고 걸쳐 있네요. 살짝 긴장 풀린 맥주 아닐까요.
Commented by sesism at 2008/06/16 11:19
중계동 은행사거리 말씀하시는 거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랑 교차로 출퇴근 하십니다. 암튼 동네에서 근무하신다니 반갑고요,
충무김밥 무를 식초에 절이는 군요. 저희 엄마는 그냥 깍두기 담그듯 하시던데 아무래도 충무김밥 집에서 파는 맛은 안 납니다.
근데 오징어 정말 탐스럽군요!
Commented by 토끼 at 2008/06/16 11:52
우웅...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군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6/16 17:23
빈틈씨님/ 마시다가 찍은거라 맥주안에 다량의 아밀라아제가 섞이며 거품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닝닝.
예전엔 음식 자주 만들어 마나님께 올리던 나름 강원도의 알렉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꿈의대화님/ 저도 방가~

marlowe님/ 서울로 컴백한지 한 9개월 됐습니다. 허약모드가 계속되니 요즘 미칠 지경이네요.

우유차님/ 얼마전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던 경기가 생각나네요..
맥주의 긴장이 풀린 건 침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_-;;

sesism님/ 그 근방의 최고번화가죠. 은행사거리!
8시50분쯤 이마에 반짝이는 땀한방울을 머금고 하계역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올라가는, 후광이 빛나는 소년이 있다면 그건 미소년 지루박.
담에 세이브존 지하식당가에서 번개라도..^^

토끼님/ 의외로 밥싸는게 젤 힘들던데요. 쉽게 될 줄 알았는데 밥을 고르게 펴기가 힘들었어요.

Commented by 리체 at 2008/06/16 22:38
지루박님의 글맛보다 더 맛있는 요리가 있을까요? ㅎㅎ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6/17 20:19
몸둘바를 몰겄습니다... :D
Commented at 2008/06/23 12: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unctual at 2008/07/04 15:11
통영 여행에서 한이 맺힌 것도 있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8/07/05 23:07
이야기하자면 복잡한데..
여하튼 처가집 식구들이랑 여행갔다가 식문화와 단체문화에 적응이 안되서 난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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