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219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아침. 평소보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버렸다.
점심때쯤이나 일어나서 허겁지겁 요기나 면하던 평소대로의 식단은 오늘만큼은 해방인 셈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역시 일품이다. 마루로 드는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왠지 2시간을 공으로 번 듯 하다.
어제 자기 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작은 수첩에 대강 메모해 놓았었는데 실천 가능하게 된 셈이다.
메모습관은 거지같던 전 직장에서 얻은 그나마의 수확이다. 하지만 고마운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밖을 나서니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다. 추위에 상당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어 여느때처럼 두툼한 외투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나왔는데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득 드는 생각은 올 겨울엔 외출이 드물었으니 외투를 드라이 안 해 놓아도 되겠다는 것이다.

극장엔 관객들이 그리 많지가 않다. 녀석들의 방학이 끝나 가는 모양이다. 신난다.

어젯밤에 메모해둔 영화제목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다. 그 제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기만 하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그 제목의 아류라니,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창조해낸 제목 같다.
역시 능력있는 직원을 뽑는 일은 중요하다. 억지로 우리말로 지으려 하지말고 그냥 '로스트 인 트랜스레이션'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광고를 찍으러 일본에 머무는 서양의 인기배우 밥과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같은 곳에 머무르게 된 샬롯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이국의 낯선 문화도 그렇거니와 그들이 포함되어 있던 관계들, 즉 밥과 그의 부인과의 관계, 샬롯과 그의 남편과의 관계가 그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한다. 이렇게 낯선 세계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소외감과 소통의 불편함등은 둘의 만남으로 인해 해소되는 듯하다.

제목은 사랑이 통역이 되는거냐고 감히 관객님께 따지고 있지만 딱히 '사랑'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사랑보다는 낯선 곳에서 그들이 공유하게 되는 유대감, 우정, 동질감 이라고 해야 옳을 듯 하다.
단언컨대 제목 중 한 단어인 'translation'는 '통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된 계기인 이국으로부터의 '이동'내지는 '다른쪽에서 넘어오는 것'(한단어로 뭐라고 해야하나..)을 의미할 것이며 'lost'는 '소통부재', '공허감'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제목이 못마땅한 이유는 그래서다. 사랑이 통역이 되느냐고 묻는 당돌한 질문은 어딘지 모르게 촐랑거리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여하튼 넓은 의미의 사랑에 관한 영화이지만 주인공인 두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선 허무함이나 밍밍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보다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나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또는 왕가위의 <화양연화>에 더 가깝다.
범벅된 눈물과 콧물을 한바가지 쏟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개운함을 느끼는 이들에겐 즐거움을 주기가 힘들어 보인다.

그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작은 일상에서 오해하고 실수하고 감정의 추이를 눈빛으로 읽어내고 이해하는 법들을 지켜보면서 감정을 나 자신에 대비시켜 보는 것은 재미있다.
자신에게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최고!'라고 말할 정도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감을 느낀 정도의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by 지루박 | 2004/02/19 23:25 | 울지마 영화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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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유니 at 2004/02/19 23:39
^^1등~!!상주세요~~~^^!
Commented by 블루브라 at 2004/02/20 00:42
아싸! 2등
Commented by 지연 at 2004/02/20 00:44
아~ 지금 미국서는 일본을 주제로 한 영화가 인기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슬쩍 몇장면 보여준 바로 그 영화군요. 아마, 일본에서 외국인(外國人)을 외국인이라 표현안하고, 외인(外人)이라고 표현하는 그 이유를 알거같은 영화라는 느낌이 오네요..근데, 이게 문법적으로 맞게 쓴건가.주절주절 써서...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4/02/20 01:14
유니님 // 1등 축하드립니다. 빰빠라라밤~ 별안간 등수놀이라니 당황스럽군요... 등수놀이는 한때의 제 전공이었는데..
블루브라 // 이런 따라쟁이 같으니.. 뭔가 창조적인 걸 할 순 없었나?
지연 님 // 갑자기 '외인구단'이 생각나버렸습니다... 여하튼 영화에선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비하나 그들의 우월감같은것도 느껴지던데 딱히 주제에 거슬릴만한 건 아니었구요.. 근데 일본은 왜 그렇게 영화 개봉일이 늦은지 모르겠어요...홍보와 배급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길래..항상 의문입니다...
Commented by finn at 2004/02/20 11:51
어둠의 경로로 한달 전쯤 본 영환데. 오늘 개봉이죠? 극장에서 한번 더 보려고 나가려는 참입니다. Mood 있는 영화였어요.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그 공허감에 공감도 갔구요. 그러고보니 화양영화 영어 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네요.
Commented at 2004/02/20 12: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4/02/20 14:47
finn 님// 요즘 저도 어둠의 경로에의 유혹땜에 흔들흔들입니다. 아..무드...맞아요, 무드!! 전 좀 건조한 쪽으로 관람했었는데 적절한 단어같습니다. 재미있게 보고 오세요~~
유니 님 // 휴....저도 영화 혼자 보고 싶진 않아요... 전 95%이상 영화는 혼자 봐요. 애정, 경제, 취향, 왕따(!)...이런 복합적인 문제땜에요..근데 '영화는 혼자 봐야 집중이 잘된다'는 솔로부대강령은 정말 신봉하는 편입니다.
Commented at 2004/02/21 01: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4/02/21 03:34
으하하핫~~~~ 애인!!!!!!!! ;;;;;;;;;;;;; 유니님..곤란합니다..^^;;; 답변은 어떤 질문의 답변을 말씀하시는지.. 저 영화는 혼자 봤구요.. 언급하신 분은 여기 오시는 다른 분들처럼 이글루를 통한 관계, texts from..은 개인적으로도 자주가는 이글루중 한 곳, 그리고 원래 유명하신 분이라 신기하고 반가운 분..뭐..그렇죠. '애인'으로 오해받은 '오빠'에 대해선 하하..저도 잘모르겠습니다.^^ '자네 맘에 들어'정도의 애교있는 호칭 아니었나요? 아님 어쩌나^^ 아이구 전 지금 이 순간 너무 재밌습니다.
Commented by Enola_Gay at 2004/02/21 06:11
흑.
Commented by nipple at 2004/02/21 19:23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 만큼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서 입소문이라는게 영 신통치 않다고 해요. 그래서 사전 마켓팅에 특히 공을 많이 들인다고 하네요. 그래서 늦는다고 들은것 같아요;
Commented by 지루박 at 2004/02/21 20:31
Enola_Gay 님 // 에헤헤헤헤헤헤헤헤헤
nipple 님 // 아..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저는 일본 국내 배급사의 횡포가 있는건 아닌지 궁금했었는데... 역시...nipple님도 만세!!
Commented by Enola_Gay at 2004/02/23 02:02
흥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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