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표류기(1)
지난 8월 중순, 민족의 대명절 여름휴가를 맞아 갑자기 제주도 순회공연을 하게 된 패밀리.
'24개월 이하 꼬맹이는 비행기 공짜'라는 사실을 알게된 와입후께서 '지금 꼭 가야해'라며 서둘러 계획.
24개월을 하루 남겨둔,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 전날 제주도를 떠나는 일정으로 아슬아슬 매진임박 타임세일에 진입성공.
공짜와 마일리지로 점철된 비행기값은 그렇다치고 매달 생활비도 쪼들리는 거지같은 형편에 경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마구마구 걱정이 됨. 하지만 역시 대한민국은 신용사회. 카드 한장이면 못먹는 것도, 못사는 것도 없는 '내가 바로 이건희'인생을 만들어주는 지라 신나게 즐기다 온 제주 표류기.

첫날.
출발 전날 밤까지 와입후와 대판 싸우다가 출발했던지라 가족간의 들뜬 기운이 전혀 없는 침묵으로 여행이 시작.
이젠 싸우는 소재와 주제도 익숙하고, 싸움의 시간적 배경과 장소적 배경, 서정적 자아의 사상과 고뇌도 익숙한지라 그러려니 하지만 속은 언제나 바카디151 한병을 들이킨 듯이 벌겋게 타들어감.

생애 첫 비행인 어린이는 맨체스터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프리미어리거를 꿈꾸는 것처럼 마냥 설레지만 화가 안풀린 엄마는 앞좌석 이름모를 아저씨의 머리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콧바람에 불어나오는 코딱지를 묵묵히 밀어넣을 뿐.

제주공항에 도착한 어린이는 흥분에 겨워 빵구를 껴서 영역을 표시하고.
아들의 향기로운 독가스에 얼굴 마취가 점점 풀어지기 시작.

없이 사는 인생의 여행답게 안방마님 지인이 경영하는 펜션에 싸게 입주.
그다지 고급스런 펜션은 아니지만 베란다 앞에 바로 바다가 펼쳐진 자연조건은 최상.
침대 위에서 맛사지사를 기다리는 우리 어린이.

저렴한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지인의 펜션을 홍보.
공항에서 20분 거리인 제주시 외도동에 위치한 펜션은 올 초에 새로 지어져서 깔끔하고 우아한 실내장식을 갖추고 있으며 격조와 품위를 겸비한 서비스로 손님 여러분들의 여행을 보다 편안히 도울 것입니다.
 
팔자 걸음인 아빠 옆으로 '바다다~'하며 철모르고 질주하는 어린이.
바다를 바라보며 같이 소주를 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아빠.

이런 게는 발에 밟히도록 나오는 해변.

펜션 주인장 내외와 같이 밥 먹었던 인근 횟집.
해리포터 마냥 손가락으로 물고기들을 통솔하는 마술 같은 리더쉽을 보았음. 우리 아들은 천재임.

밥 먹고 테디베어 뮤지엄에 감.
곰돌이를 보고 혼자 뛰어가더니 사진 찍던 사람들 다 밀어내고 저렇게 버텨버림. 아무도 접근 못하는 촬영 공황 사태를 일으킴.


여행 중 가장 쓸만한 사진을 하나 건짐.
사진 찍을 때 이렇게 자세를 잡아주는 일이 없었는데 기적이 일어남.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곰순이 언니를 향해 언짢은 표정을 날림.
개나 인형같은 것들이 무언가를 하면 사람 취급을 안하는 경향이 있음. 뭔가 속아주는 순수함은 없음.

한 30분 동안 혼자 음악 틀고 춤추고 놀았음.
관광객들이 아주 즐거워 함. 그 광경을 본 아빠가 흐뭇해서 웃고 햇님도 웃고 하늘도 함께 웃음.

저녁 6시 경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돈내코 유원지'라는 곳을 감.
관광객보단 주민들이 많이 오는, 계곡이 있고 물놀이도 하고 어쩌구 하는 곳이었는데 땅이 축축한데다 계곡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포기함. 돈내고 가는 곳이었으면 큰 일 날뻔 했음.

아들의 쾌속 질주 사진을 찍으면 항상 이런 식의 포즈가 되서 아빠는 언제나 즐거움.

유명한 서귀포의 진주식당을 감. 전복뚝배기에 전복이 아주 많이 들어 있어서 놀랐음.
음식은 고저쓰하나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들의 태도는 개판임. 안방마님이 식당에서 파는 젓갈을 사려고 아줌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으나 투덜거리며 그냥 나옴. 이것저것 질문해도 대답을 잘 안해줘서 기분이 나빠서 그냥 나왔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식당 아줌마의 반응이 조금은 이해가 됨. 태평양 선물셋트1호만큼이나 다양한 잔소리를 듣고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그 질문공세가 심히 괴로웠을 것으로 익히 사료됨. 아줌마 지못미.

전복죽으로 유명한 집은 아닌데 전복 반, 곡식 반의 역대 최강의 전복죽이었음. 이 집은 해물 뚝배기보다 이게 더 진국인 듯.

밤엔 그냥 자기 뭐해서 인근 횟집에서 한치회를 사다 먹음.
생선 대가리를 과감히 내려 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는 대단히 엉성한 횟집 이었음.
소주는 한라산, 이거슨 진리. 서울에서 파는 곳 있으면 제보 부탁함.

표류 첫날의 이야기, 다음회는 과연 언제쯤...?
by 지루박 | 2009/09/07 00:14 | 달려라 일기 | 트랙백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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